길(道)
본격적으로 오름 탐방을 위해 길을 나선 것은 5년 전쯤 되며 당시 이승악을 찾았다. 이승이오름이라고도 부르는 이 기생화산은 "저승과 이승"이라는 뉘앙스를 주어 이름을 쉽게 기억할 수 있었는데 목장길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도로를 따라 500m 정도 내려가니 "신례천 생태숲길"이라는 팻말이 나와 이곳이 또 다른 입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각종 명칭의 길에 익숙해 있지만, 그때는 숲 속을 걸으며 '생태숲길이라는 이름을 잘도 지어놨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걷기 열풍이 일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요즈음 걷는데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제주도에서 <올레길>이라는 명칭을 만들어 걷기운동의 불을 댕기기 시작하자 전국의 각급 지자체에서 <000 둘레길>, <000 옛길>, <000 성터길>, <000 숲길>, <000 산책로>, <000 등산로> 등을 비롯해 바우덕이길, 곰달래길 등 지역적인 특성을 찾아 다양한 이름을 붙여 걷기 장소를 만들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새주소 부여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국의 주소가 대부분 길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바야흐로 "길 위에서 길을 찾는다."라는 어느 시인의 글귀가 주목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길 위에서"라는 용어가 얼마나 가슴 깊이 스며들었으면 소설의 제목이 되고 영화나 만화도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는 더욱 많이 등장한다. "길 위에서 길을 잃다", "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 위에서 길을 묻다", "길 위에서 길을 만나다",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등등 길이 화두가 되어 글은 길을 헤매게 되었다.
이승악으로 가는 생태탐방로를 따라가다 보니 비록 건천이지만 중간중간 물이 고여있는 곳이 많이 보였는데 작은 연못만 한 어느 큰 웅덩이 옆의 바위 위에서 한 사람이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마 道를 닦는 사람 같았다. 산속을 날아다닌다는 道士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좌정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분위기는 제법 경건하여 과연 '道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일깨워주었다.
道란 길도 字 道이기 때문에 곧 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道라고 하면 길보다는 다른 의미를 두게 된다. 우선 道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사항, 즉 道理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도교에서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뛰어난 경지도 道가 되고 태권도나 유도 등 무술인들이 연마하는 것도 道가 되기도 하며 행정구역 단위로도 道가 사용된다.
물론 道가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길, 즉 자동차 전용도로나 고속도로 등 大道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케이블카의 길을 索道라고 한다거나 음식물이 내려가는 길인 食道와 숨을 쉬는 氣道처럼 인간의 일상생활이나 신체 등에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쨌든 길이 되었든 道가 되었든 인간과 직접 관련이 되어 있다. 사람이 가는 곳은 길이요, 道가 된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디에서 왔다가 어느 곳으로 가는지 몰라도 늘 "길 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길 위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면 곧 道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별도로 道를 닦지 않아도 길을 가기만 해도 수행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신례천 생태숲길은 이승이오름을 오른 후 목장길을 따라 내려오게 된다. 남원읍에서는 탐방객들의 걷기 운동을 위해서 콘크리트로 포장된 이 목장길 옆에 산책로를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제주말로 송이라고 불리는 화산석 스코리아(破碎石)를 이쁘게 깔아 놓았지만, 모래밭을 걷는 것이 힘든 것처럼 이 길을 걷는 것도 약간은 힘이 더 필요하다. 숲길에서 출발해 오름을 오른 후 피곤해졌기에 거액의 자금을 들여 만들어 놓은 이 길을 걷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런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곳도 있었다. 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닌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요즈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길을 나선다. <올레길>, <한라산 둘레길>, <000 숲길>을 비롯해 오름이나 곶자왈과 연계된 길을 걷는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터벅터벅 걷기도 하고 이런저런 망상에 휩싸여 길을 가는 줄 모르게 걸어가기도 한다. 모름지기 "길 위에 있는 나"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길을 걷는 때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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