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이야기(씨 뿌려 거둘지니-시인 최절로를 그리워하며)
보리와 연관된 문학을 거론하다보면 보리피리로 유명한 한아운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보리를 매우 사랑한 시인 중에는 최절로라는 사람도 있었다.
본명은 崔成敏이지만 필명으로 岊鷺라는 특이한 이름을 썼다.
호는 閑山인데 서예 작품에는 놀뫼란 한글 호를 낙관으로 사용했다.
자신을 표현할 때는 종종 詩客이란 용어를 애용했다.
최 시인은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이 어려웠다고 한다.
사실 1930년대는 전국 어디서나 먹고 살기 힘들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보리죽은 못 먹는가?”라는 장시가 있다.
일제강점기 어린 시절의 척박한 시골 모습을 인상 깊게 표현한 글이라 호평 받는다.
보리죽은 못 먹는가?
.....................
......................
놋그릇 놋요강 쇠붙이 모두
전쟁무기 생산공장으로 가버렸으니
지은 농사 공출 다바쳐
먹을 것도 없는 판국에
이빨빠진 질그릇
보리죽이라도 거득 담아주었으면 싶은데
피보리 등겨 개떡도 배불리 못먹어
쑥나물 뜯는 아낙들 일손 바쁘지
개껍데기도 벗겨서 바치고
앙고라 토끼털 깎는 아해들
눈앞이 노오랗다.
영양실조라는 말뜻을 모를 때라
한참 클적에는 으례 그러려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느니라.
참 그럴적에는
배는 고프지
신발이 있나
옷이 변변한가 내나라 말로 어미
부를 수도 아비 부를 수도 없고
한마디로 체면은 있어
생활은 걸뱅이 보다 못했었지. *
그래도 사는게 무엇인지
............................
..........................
* 시집 [고향](고향문학사, 1982) 속에서
최 시인은 보리죽을 먹으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매우 험난한 시절 깡촌에서 대도시로 나가 고등교육을 마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마산고를 나와 한양대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주택공사에 입사해 먹고 살만해 졌다.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서인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거지들에게 밥을 많이 사주었다고 한다.
신경림 시인이 1968년 교육평론사 편집장을 할 당시 서대문 인근에서 친구인 거지대장을
비롯해 많은 거지들을 거둬준 기록을 하는 등 문인들의 회고록에 자주 등장한다.
최절로는 공학도로 출발했지만 문화예술적 측면에서는 건축가라 할 수 있다.
초기 대한민국건축가협회의 소수 정예회원 중 한 명으로 동록이 될 정도였다.
물론 대학 재학 중인 1957년 시집 [이랑]을 출간하는 등 일찍부터 문단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주택공사를 나와 경남일보 논설위원과 한국예총 사무총장 등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서예와 조각 그리고 그림까지 섭렵했다. 전서의 독특한 서체까지 창안하게 되었다.
1990년도 전후 무렵 농촌의 보리가 모두 사라지자 보리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씨 뿌려 거둘지니”라는 주제를 갖고 나와 교육적 차원의 잘 익은 보리를 그렸다.
그는 액자, 족자, 부채, 항아리 등을 만들어 보리를 그리고 글씨를 써 넣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하였는데 지금은 인사동에 가끔 매물로 나온다.
청송 김송배 시인은 그가 만난 문인들을 소개하면서 최절로에 대한 기억을
“씨 뿌려 거둘지니” 라고 쓴 족자를 기증받았음에서 출발한다.
최 시인으로부터 작은 연적을 비롯해 무엇이든 받은 사람들은
그의 정이 많고 호탕했던 성격과 다재다능했던 솜씨를 회상하게 될 것이다.
詩客 최절로는 2012년 초에 작고하였다.
그는 보리를 힘써 일한 노력의 대상물로만 생각하고 결실을 맺은 보리를 그렸다.
그러나 사라졌던 보리 파종이 2010년을 전후 해 갑자기 증가한 사연은 다르다.
익은 보리, 나아가 보리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레져용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청보리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 시인이 죽기 전에 청보리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아마 그는 청보리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청보리-씨 뿌려 거둘지니!
시인이여!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시대가 바뀌면 삶의 방식도 변한답니다
보리가 우리 조상의 양식이었던 점
부정할 순 없지만
이젠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이랍니다
그렇다 해도 보리의 순환에 인생을 대입시켜
인성을 일깨운 시인의 공로는 변하지 않고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시인이여!
하늘 보고 한숨짓지도 마십시오
청보리란 말, 새로 생긴 용어 맞습니다
감성을 자극한 돈 벌이용이란 지적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지만
중생의 무너져 내리는 정신에 도움 준다면
보리도 기쁠지 모릅니다
씨 뿌려 거둔다는 그 말이
눈에 안 보이는 정신적 수확을 얻는다는
새로운 해석 나와 각광받을 수도 있답니다
시인이여!
그냥 웃고 바라봅시다
요즘엔 농부 대신 관에서 씨를 뿌린답니다
보리밭 사잇길을 소 몰고 가는 것보다
알록달록 관광객 걷는 모습 기대하고
아이들 보리밭에서 꿈을 꾸게 하는 것보다
화가나 사진작가 모델 만들어 주는 것이
보리 씨 뿌리는 목적 되었답니다
그래서 청보리라는 말 나오게 되었는데
건강과 미를 위해서도 보리 사용한다 하니
우리 새로운 노래나 불러봅시다.
* 유유시집 [꽃 이름 물어보았네](도서출판 국보, 2013) 속에서
청보리는 사전에 없는 용어로써 보리가 수정이 끝난 후 낱알이 노란색으로 익기 전까지의
초록색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고창군에서 청보리밭 축제를 만들어 상용화되었고 완도군에서 청산도 청보리 축제를,
제주도에서도 가파도 청보리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청보리는 건강식과 화장품용으로 개발되고 있는 추세라 한다.
최 시인도 보리를 노력의 결실이나 근로의 보람 등 교육적 또는 산업적 차원으로만
접근한 것은 아니다. 보리에서 인간성을 찾으려 한 흔적이 보이는 시도 있다.
産鄕 - 4월
봄 4월
햇강아지
어미 젖가슴 파고들면
보리 꽃 바람에 날려
가시내 겨드랑 밑
수줍다.
보채는 젖먹이
달래는
쭈그러진 할매
손길 다사롭다.
5월을 향해
따사롭다.
* 최절로 시집 [춤추는 허사비](도서출판 문단, 1992) 속에서
한산 최절로는 한 때 시인 천상병과 같이 간첩 행위 여부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는 어느 교포의 한식당 한 편에 한국 고향을 그리는 방이 있는데
친구인 천상병의 귀천 시를 최절로가 글씨와 그림으로 만들어 놓은 액자가 걸려있다.
주인이 이 작품 소장으로 인해 곤혹을 치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제가 되었었다.
그렇지만 최절로는 국가관이 투철하였고 대단한 애국자였다.
해방 후 우익의 선봉에 섰던 문단의 거두 김동리를 핵심으로 추대하여
1990년 나라가 좌편향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시국선언까지 주도하게 되었다.
[조국문학]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6.25나 월남전 등 전쟁문학 작품을 비롯해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각종 시와 수필을 발굴해 수록하였다.
백령도 흑룡부대에 가면 지금도 그가 쓴 “충절의 섬” 시리즈 시가 붙어있다.
최 시인을 생각해 볼 때
전국 여기저기에서 보리를 많이 심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자체에서 지원금을 주어 관광용으로 가꾸든 아니면 수확을 위한 것이든 상관없다.
농부는 보리가 익으면 수확을 위해 땀을 더 흘릴 것이지만
보리빵과 같은 웰빙 음식을 개발해 판매한다는 즐거움을 주게 된다.
사라졌던 보리밭이 다시 생겨나고 봄날의 종달새가 둥지 틀 자리도 늘어 간다.
어려운 시절을 상징하는 보릿고개란 말도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시대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는 것처럼
보리도 바뀌어 가고 있을 뿐이다.
씨 뿌려 거둘지니
유유
보리를 말리면
땀 방울 더 깊이 파고들어
사리가 된 채
내세를 기다린다
복권도 경마도
씨를 뿌리기에 거둔다는
되먹지 못한 강짜
콘크리트 바닥에
흩뿌려진
강화유리 알갱이가
뒹굴면서 웃어라
씨를 뿌림은
땀 흘려 가꾸겠다는 약속
수확이란 희망이
인간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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