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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문

잉카인의 삶 엿보기

잉카인의 삶 엿보기

 

 

 

 

잉카인이라 하면 잉카제국의 인디오 사람들을 말한다. 잉카제국은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북부 중앙 안데스지방에 고대국가를 건설했던 왕국을 말하며 께츄아족이 중심이 되어 주변의 10여개 민족을 통합함으로 형성되었다.

 

 

 

 

잉카족은 상당수 숫자가 원형을 유지하면서 살아 남아 있다. 멕시코를 비롯한 중미 지방의 아즈텍 민족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의 남미에서 살던 인디오들이 종족 자체가 사라진데 비해 잉카족은 일부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최하위 계층인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남자들은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악기를 연주해 주고 1달라에 목을 메는 서러운 삶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산간지역에 사는 잉카족은 옥수수를 재배하는 등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반면 도시 인근지역에 사는 여성들은 새벽 일찍 관광지를 찾아 와 좌판을 깔고 손으로 뜬 알파카 제품과 농산물 등을 판매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어떤 여자들은 2시간에 걸쳐 리마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와 모델 역할을 하고 1달라를 받는데 한푼도 못벌고 저녁에 다시 산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고 한다.

 

 

 

 

 

잉카제국은 페루 남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티티카카호수에 근원을 둔 께추아족의 만꼬까팍이 북족으로 진출하여 꾸스꼬에 태양의 신전을 세우고 주변을 통치를 하면서 탄생하였다. 이후 제9대 왕 빠차꾸떼가 영토를 가장 넓히고 도시도 최고로 번성시켰는데 11대 왕에 이르러 이복형제간의 왕권다툼과 국방 능력이 약한 상태에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정복자 168명에 의해 1532년 나라가 망했다.

 

 

 

 

 

잉카제국의 축성술은 대단한 편이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돌을 쌓았다. 돌을 절단하고 다듬고 또 거대한 기중기를 다룰 수 있는 현대에도 잉카의 옛 축성 사례를 재현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돌을 자를 때 돌 조각과 나무와 물을 이용해서 아주 정확하게 돌을 맞춤으로써 얇은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무지개신전 벽감 중간에 난 창문 모습인데 창문이 벽을 넘어 연결되어 보인다. 돌 쌓는 기술은 신전에서 최고로 발휘햇다. 빈틈없이 정교하게 맞춘 기술과 돌을 높이 들어 균형을 맞춘 측량기술도 대단하다.

 

 

 

 

 

신전을 지을 때 돌을 단순하게 그냥 올려 놓는 것이 아니다. 돌의 중간에 요철을 만들어 이를 서로 결합함으로써 견고성을 유지하려 했다. 안데스산맥 북서부지역은 지진이 많은 곳이다. 옛 잉카인들도 지진을 의식해 신전 건물을 튼튼하게 건설하기 위한 방식을 보여준다.

 

 

 

 

수십톤에 달하는 무거운 돌을 운반해 삭사이와망에 성을 쌓았으면 무얼하겠는가. 6,000여명의 군대로 호위받는 왕이 160명에 불과한 스페인 군대와 싸움 한번 못하고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황금을 바친 후에 비참하게 처형당한 것은 잉카인을 지금까지 슬프게 하고 있다.

 

 

 

 

잉카제국은 약 100년간 번성했다. 그런데 그 100년간의 문화가 오늘날 매우 주목을 받고 있다. 잉카족은 언어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겨우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긴 통신문 등으로 잉카 멸망 전후의 상황을 예측할 뿐이다. 높은 산악지대에 계단식 밭을 일구었던 흔적 등 돌에 의한 자취만이 후세에게 무언가를 알릴뿐이다.

 

 

 

 

라마와 같이 생활했던 잉카인들, 그들은 폐루 사회의 최하층민으로써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잉카제국은 배꼽이라는 뜻의 꾸스꼬가 세계의 중심지라고 믿었으며 4방향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따우안띤수요라 했다고 한다. 그랬던 잉카는 지금 관광객만이 드나들 뿐이다.

 

 

 

 

잉카의 후예들은 상당수가 산악지역에 몇몇 가구씩 살고 있다. 물론 수도였던 꾸스꼬 시내와 주변에도 많이 살면서 관광 수입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꾸스꼬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되어 과거의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고산지대 숲속에 묻혀 보존되어 온 태양의 신전 마추픽추로 가는 우루밤바 지역은 아직도 잉카 사람들이 옛날처럼 그대로 살고 있다.

 

우루밤바에서 마추픽추 아래의 역까지 가는 중간쯤 기차역이 자리잡은 올란따이땀보 인근 마을은 관광객들이 잉카인의 생활을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마을 안길 좌우 벽이 돌로 쌓여진  어느 골목에 여자 인디오가 아이를 데리고 있다. 등에는 아기가 엎혀있다.

 

 

 

 

좁은 골목 기하학적인 모습이다. 중간에 있는 선은 수로이며 빗물이 빠지게 만들었고 필요시 생활용수도 흘러내린다고 한다.

 

 

 

마을은 작은 집들로 꽉 차있었다. 집은 돌로 주변을 한 바퀴 둘러쌓고 그 위는 짚풀로 덮었다. 신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축물이 규모나 형태만 다르지 돌과 풀을 이용한 것은 동일하다.

 

 

 

 

돌로 방을 둘러 쌓았기 때문에 어두울 수 밖에 없는 점을 감안 지붕에는 자연 채광을 하였다. 지혜가 엿보이는 모습이다.

 

 

 

 

방의 중간 벽면 가장 중요한 지점은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다. 잉카인들은 통치적 차원에서는 태양신과 네 방향 신전을 갖고 있지만 일반 서민들은 조상신을 섬긴다고 한다. 자신들의 조상 해골을 방에 안치하고 매일 꽃을 바치고 촛불을 켜 놓아둔다고 한다.

 

 

 

 

해골이 3개인 집이 있었다. 조상이 1부2처였던 모양이다. 곁에 있는 동물은 재규어 사촌쯤으로 추정된다. 박제로 걸려진 동물도 3마리다. 조상신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듯 하다.

 

 

 

 

방의 한 귀퉁이는 식량 창고 곧 곳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옥수수 담겨진 채반이 있고 식량을 담아 놓는 항아리와 그 앞에 작은 동물이 있다.

 

 

 

 

잉카인 최고의 단백질 보충 고기 원료가 되는 것이 쥐의 일종이다. 원주민 말로 꾸이라고 부르며 영어식 표현은 기니피그라 한다. 다 자라면 토끼만한데 집의 한 구석 어두운 곳인 꼴까에서 풀을 주어 키우며 어느 정도 크면 잡아 먹는다.

 

 

 

 

부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출입문 옆에 있다. 아궁이 하나가 부엌의 전부이다. 항시 불이 붙여져 있다고 했다.

 

 

 

 

 

우루밤바에 사는 잉카인의 주식은 옥수수이다. 옥수수를 심고 수확하는 농기기구 벽에 걸려있다. 옥수수대는 왜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없다.

 

 

 

 

페루 국민 90%가 천주교인이라고 했다. 잉카인들은 아직도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 많다. 그런데 조상신 옆에 천주교 관견 사진이 놓여 있다. 아마 공존이 가능한 모양이다. 잉카인들은 과거 태양신을 숭배하다가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하긴 천주교도 일요일(태양의 날)에 하나님을 모시는 태양신 숭배에서 태어났으니 어찌보면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방 한 구석에는 곡식이 진열되어 있다. 아마 이것은 내년도 밭을 이룰 씨앗을 보관하는 것 같았다.

 

 

 

 

 

천정 중앙에 대들보처럼 큰 나무를 연결하고 시렁을 만들어 식재료르 매달아 놓았다. 옥수수를 비롯해 말린 고기와 생선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고기는 빠또라 불리는 오리도 있다고 한다.

 

 

 

 

관광객에게 개방된 잉카인의 집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 되어 있다.

한편은 옛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는 관광상품을 쌓아 놓고 있다. 정면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고 현대식 의자가 놓여있다.

 

 

 

 

먹고 살려면 좋은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잉카 여성이 집안에서 관광상품을 팔고 있는데 관광객은 잘 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여성은 제법 부티가 나 보인다. 적어도 찌들은 잉카인은 아니다. 스페인 냄새가 많이 난다. 아마 혼혈인 메스티조인 것 같은데 집 주인이 아님이 분명한 이곳에서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사연이 궁금하다.

 

 

 

 

잉카제국이 멸망한 후 왕족의 마지막 후손인 뚜빡 아마루2세가 우르밤바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1년만에 잡혀 사지가 찢기는 사형을 받았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과거 조국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나라를 찾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어섰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백인들 밑에서 핍박 받으며 설움을 참고 살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잉카마을 수로엔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건만........

 

한때 화려했던 잉카문명의 소멸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