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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필과 산문

바람과 깃발

바람과 깃발

 

 

깃발은 늘 바람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다.

잔잔하게 불어주는 바람이야말로 깃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며 깃발이 비로소 깃발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모진 광풍으로 시달리며 여러 군데 찢기고 부서질 때엔 원망하기도 했고 바람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한탄도 해 봤지만, 막상 바람이 멎으면 그 공허함을 이겨낼 수 없다.

축 늘어져만 있는 깃발은 이미 깃발의 값어치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람이 없으면 깃발은 결코 "영원한 노스탈자의 손수건"이 될 수 없다. 바람이 깃발을 휘날리게 함에도 바람은 "깃대가 깃발을 흔들고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해 어떠한 이의를 제기한다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깃발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 온갖 감수성을 느낀다 해도 바람은 굳이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키려 하지 않는다.

바람은 자랑하는 법이 없다. 깃발에게 결코 알아 달라고 하지 않는다.

 

깃발은 바람 앞에 늘 수동적이어야 한다.

순종해야 하는 것도 숙명이다. 그

렇다고 바람을 원망해 본 적은 없다.

깃발은 바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란 걸 잘 안다.

따라서 바람 없는 깃발이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렇기에 깃발은 어떤 바람도 받아들인다. 살랑이는 바람만 사랑할 수는 없다.

군중의 함성을 나타내는 힘찬 펄럭임도 신호를 보내야 하는 주기적인 흔들림도 때론 고통을 상징하는 파열음까지 모두 다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깃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바람과 깃발이 동족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매우 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바람과 깃발은 각각 독자적인 존재임에도 한 몸을 유지할 때 주목받게 된다.

휘날리는 깃발을 보고 사람들이 용기를 가질 때 바람과 깃발은 같이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