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수필과 산문

鷄龍山 잡신 속에 묻혀 살던 바람

鷄龍山 잡신 속에 묻혀 살던 바람

 

계룡산은 名山이고 靈山이라고 한다. 고대부터 五嶽 중의 하나에 속해 심신수양 장소이면서도 신성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朝鮮을 건국한 이성계가 계룡산 동남쪽 기슭에 새로운 도시(新都)를 만들어 수도로 삼으려 했었고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상향시킨 고종황제는 계룡산 서남쪽 기슭에 中嶽壇을 건립해 기도를 하도록 했는가 하면(상악단은 묘향산, 하악단은 지리산에 설치) 朴 전 대통령이 계룡산 북동쪽으로 수도 이전을 추진했었고 현재는 비록 청와대를 비롯한 3부의 청사가 이전되는 수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세종시가 들어선 것 자체가 이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에도 首都 등 국가 중요 장소를 정함에 있어 교통이나 외부 연계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지형의 특성을 중시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風水를 절대적인 요소로 꼽았다. 風水는 臟風得水의 준말인데 계룡산은 臟風局의 지형이고 한양은 得水局의 지형인바 조선이 臟風 대신 得水를 선택한 것은 당시 漕運이라는 교통을 의식한 것이었을 거라고도 한다. 처음 선택한 臟風을 得水로 바꾸기 위해 할머니꿈과 鄭도령을 등장시켰고 무학대사도 역할을 하였으며 신하의 상소도 거론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계룡산의 臟風은 그야말로 숨어 살게 되었는데 등산하는 사람들 중 행여 숨은 바람을 찾아낼까 기다려 보기도 했다. 계룡산 주봉인 천황봉 아래 좌우로 계곡이 형성되어 암용추(女瀑)와 숫용추(男瀑)가 흐르고 이 사이가 신도안이 되는 바 임금이 버리고 떠나고 궁궐을 짖다만 터에는 대형 주춧돌만 난무하는 가운데 세상의 온갖 잡귀신이 들어와 1975년 종교정화사업이 실시될 때까지 성황을 이루며 살아왔다. 계룡산의 서북쪽(甲寺), 동북쪽(東鶴寺), 서남쪽(新元寺)에는 힘 센 대형 사찰이 버티고 있지만 동남쪽만은 청룡사라는 볼품없는 절이 있어 잡귀들이 이곳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과거 신도안에는 100개가 넘는 종교시설이 있었으며 물이나 돌을 섬기는 신앙을 비롯해 周易과 月影圖 등을 공부하는 역술파와 조로아스터교, 關聖敎, 甑山敎 등의 전래파, 자가 수력발전 시설을 갖춘 합숙소를 운영하는 기독교 계열은 물론 “석가· 예수· 공자· 마호메트 등 4명이 공동으로 만들었다는 세계 최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고 다양한 신앙공동체가 있었으며 계룡산의 바람은 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바람을 神으로 삼는 종교인을 찾아 다녔다.

 

바닷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바람의 神 영등을 최고로 치는데 왜 山에 사는 사람들만은 바람 알기를 우습게 아는지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계룡산의 명칭은 風水의 金鷄抱卵形과 飛龍昇天形에서 鷄와 龍을 따왔다고도 하고 연천봉에서 볼 때 천황봉에서 三佛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의 벼슬이고 산 전체는 용의 몸을 나타냈다고 해서 계룡이라 했다고도 하는데 대부분의 큰 산이 용이나 닭 벼슬을 닮지 않은 게 없는 만큼 계룡산을 좀 더 神靈시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느 신도안 예찬론자는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그럴듯한 장광설을 펴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피레네산맥에서 시작된 지구의 기운이 알프스산맥과 우랄산맥 및 히말라야산맥의 몸통을 거쳐 백두산 꼬리뼈에 이르렀다가 백두대간이라는 꼬리에서 끝나는데 꼬리 맨 끝 부분이 땅 속에 들어갔다가 살짝 모습을 보인 곳이 계룡산이라고 했다. 계룡산은 人體와 같아 산 전체에 피가 통하고 있는데 연천봉에서 물이 나오는 등 곳곳에 물이 솟아 騰雲庵이나 古王庵과 같이 높은 곳에도 암자가 세워져 있는바 젖이 나오는 곳과 오물이 나오는 곳을 잘 구별해야 하며 자신들이 있는 장소가 젖이 나온다는 등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1984년 삼군 통합본부(鷄龍臺)가 이전하여 민간인 통행금지가 되어 있을 뿐이다. 계룡대가 들어 선 이후 신도안의 온갖 잡신들은 모두 이사 가야 했다. 계룡산 바람도 이들을 따라서 나가 보았다. 잡신들의 상당수는 계룡산을 떠났지만 일부는 멀리 가지 않고 향적봉이나 國師峰 등 인근 봉우리 밑의 계곡에 웅크리기도 하고 新元寺에서 연천봉에 오르는 등산로 주변에서 좌판을 깔다 단속당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다. 어떤 神들은 자리 잡을 곳이 없자 민가로 내려와 폐가에서 신도들을 맞이하며 재기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고 또 다른 어떤 神은 토굴을 파고 땅속으로 숨어들기까지 하였다.

 

계룡산의 바람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계룡산 아래 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잡신들의 적응 능력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계룡산의 신성함을 재확인하기도 하였다. 계룡산의 관문은 甲寺라 할 수 있다. 갑사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하고 있고 과거 鷄龍寺라 불린 적도 있었다. 甲寺는 백제 초기에 건립되고 한 대 1,000여채가 있었다고도 하나 현재 가장 오래된 절도 아니고 가장 웅장하다거나 큰 사찰도 아니면서도 우리나라 최고의 절이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있다. 으뜸을 말하는 甲이라는 명칭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룡산의 서쪽이 계룡면이고 甲寺가 계룡사이기 때문에 계룡의 명칭은 동북쪽의 유성(현재 대전으로 편입)과 동남쪽의 논산이 아닌 공주가 되어야 함에도 신도안에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 鷄龍市로 명명되고 있는 점은 혼돈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잘 못 된 것이지만 아마 시정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鄭鑑錄에 계룡산 돌이 하얗게 변하고 초포에 배가 들어오면 신도가 수도가 된다고 해서 계룡산의 바람은 이때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圖讖은 圖讖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 계룡산의 바람은 계룡산에 계룡대가 들어서고 먼발치에 미래에는 반드시 수도가 될 행정복합도시인 세종시가 넓게 자리자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 > 수필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바람   (0) 2013.10.07
오름에서 만난 바람   (0) 2013.10.07
허풍 掌風   (0) 2013.10.07
바람이 변화시켰는가?   (0) 2013.10.07
폭풍 속의 파랑도  (0) 2013.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