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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필과 산문

오름에서 만난 바람

오름에서 만난 바람

 

 

어느 초겨울 주말 모처럼 제주도의 오름 트래킹을 하였다. 특색 있는 바람을 맛보고 음미하기 위해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거슨새미오름을 찾아 송당 목장길 인근에 주차를 하고 오름 오르기를 시작하였다. 거슨새미라고 하는 말은 한라산 방향으로 물이 솟아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토속어이다. 제주도의 대부분 샘이 한라산에서 바다 방향으로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지하수 흐름이 한라산 쪽으로 거슬러 역천되는 특이한 지형이라 할 수 있다.

 

오름을 오르기 위해서는 목장의 일부 구간을 가로질러 가게 되는데 가을걷이를 한 목초가 한 곁에 줄지어 쌓여 있는 가운데 수확이 끝난 땅에서는 새파란 풀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목장 담장과 연결되어 30여년전에 건립한 축사가 낡은 모습으로 건재해 있지만 사용하지 않아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현대기술의 발달로 트랙터에 의해 채취된 목초가 자동 비닐 포장되어 공터 방치 방식으로 건조시키고 보관하기 때문에 축사가 불필요해진 탓이다. 공초왓으로 불리는 목초지에 드문드문 보이는 하이얀 물체가 모두 포장된 목초라 한다. 축산에 접목된 기술의 한 유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형에서는 바람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북쪽은 거슨새미오름이 버텨있고 서쪽은 안뜰오름이 겨울바람을 막고 있는 상태에서 거친오름쪽으로 넓게 뚫린 남쪽에서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 쏘고 있었다. 복 받은 터인 것 같기도 하다. 추운 겨울에 몸이 늘어지는 느낌까지 일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산담이라고 부르는 무덤을 매우 중시한다.

 

조상숭배 정신이 강해 신중하게 고인의 유택을 찾아다니는데 무덤을 씀에 있어 한라산을 함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조건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지하 수맥의 흐름을 역류할 경우 시신이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터득한 경험측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슨새미오름의 중턱에는 한라산 방향의 산담이 여러 개 있었다.

 

북풍과 서풍을 막고 따뜻한 남쪽을 바라다보면서 자리 잡은 터에는 이름 모를 많은 새들이 노래하고 겨울에도 꽃향유 같은 들꽃이 피어있으며 제철모르는 나무들이 새순을 내고 있는가 하면 억새꽃은 아직 싱싱하게 춤을 추는 광경을 연출하니 육지의 풍수설이 이곳에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거슨새미오름 정상에 도달하니 바람이 다소 강하게 불기 시작하였다. 비록 겨울이지만 비탈을 오르며 흘리게 되는 땀을 시원하게 식혀 줄 정도의 바람이기 때문에 서풍인지 북풍인지 별다른 인식이 없었다. 다만 머리 위로 소나무 가지가 심하게 흔들리고 바람 지나가는 소리도 날카로운 것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30여 년 전에 조림되었다는 비자나무와 쥐똥나무 같은 잡목 숲을 지나며 하산하면서도 특별히 바람을 의식하지는 못했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바람과 지형의 함수관계가 아주 심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오늘의 날씨가 매우 좋은 줄로만 안 것이다.

 

거슨새미를 내려와 바로 곁에 서 있는 안뜰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북쪽에 있는 오름이 밧뜰오름이어서 서로 대조적인 이름이 붙었다. 안뜰과 밧뜰오름에는 나무가 없었다. 소와 말의 목장으로 계속 사용하기 위해 조림을 하지 않은 곳이라 한다. 경사도가 높은 오름의 남동쪽을 천천히 오르면서 아직도 피어있는 엉겅퀴꽃과 꽃향유 및 쑥부쟁이를 비롯해 봄의 꽃인 개민들레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산재한 들꽃들과 눈인사하였다. 이곳의 풀들은 지금 봄이 왔는지 아니면 아직도 가을인지 잘 모른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따금 장끼가 놀라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날아갈 땐 오히려 꿩보다 내 가슴이 섬뜩하기도 하였고 뒤 이은 적막이 마른 공기를 압축시켜 왔다. 아니나 다를까 안뜰오름의 능선에 오르자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다. 거슨새미에서 바라다 보이던 분화구는 착각이었던 탓에 없어져버리고 북으로 터진 계곡을 넘어 음산한 기운과 차가운 바람이 덮어오고 있었다.

 

차가운 앞바람에 저항하면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북서쪽 방향으로 힘든 발걸음을 옮기자 드디어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했다. 그런데 정상에서 만난 바람이야말로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바람과 전혀 달랐다. 인근의 오름 전망을 하는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눈조차 크게 뜰 수 없어 드넓고 깨끗하게 펼쳐진 경치가 어른어른 했다. 참으로 대단한 바람이었다.

 

북서풍을 맞아야 하는 밧뜰오름 방향으로 하산을 취소하고 정상 남쪽으로 조금 내려왔다. 조금 전 정상에 오르면서 보았던 연기가 나는 곳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상당수의 오름 중턱에는 일본군이 최후의 저항 진지로 삼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동원해 땅굴을 파놓았기 때문에 그 곳도 진지동굴인 듯 했다. 그런데 그러한 굴이 아니었다. 굴 입구에는 앙상한 잡목 가지 무성한 주변 지형과는 다르게 파란 고사리 군락이 있었으며 굴속에는 따뜻한 공기로 꽉 차여 있었고 가끔씩 연기로 보일 정도의 진한 수증기가 솟아 나왔다.

 

이 인근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거문오름 동굴계가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곳 동굴도 지하 깊은 동굴과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면 마치 굴뚝에 연기가 나듯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부동산 업자들은 이러한 지형을 활용해 온천이 나온다고 속여 땅을 팔았다고 하는 말이 통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어쩌다 오름을 오르면 항시 색다른 바람을 만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바람도 다르거니와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서도 다르다. 한번 만난 바람을 다시 만나는 경우는 없다. 이미 지나간 바람이 다시 올 리 만무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땐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은 바람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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