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풍(吟風, 陰風, 淫風)
吟風은 바람을 읊는다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등지에서 여러 해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여덟 가지 자연의 맛을 즐겼다고 했는데 그중 첫째로 吟風을 제시했다. ‘西風過家來(서풍은 집을 스쳐 불어오고) 東風過我去(동풍은 나를 스쳐 지나간다) 只聞風來聲(바람 오는 소리만 들릴 뿐) 不見風起處(바람 이는 곳은 볼 수가 없도다)’ 아주 자연스럽게 바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吟風은 말을 하기는 쉬워도 그럴듯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바람을 시로 읊는다는 것은 바람에 그만큼 몰입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吟風에 따라붙는 것이 弄月이다. 吟風弄月은 바람과 달을 겸해 상호 어우러지게 즐기는 것을 일컫는다. 물론 정약용도 遷居八趣의 두 번째로 弄月을 꼽았다. 정약용은 바람과 달 외에 구름, 비, 산, 물, 꽃, 버드나무를 합해 8가지 자연의 맛에 대해 시를 남겼다. 자연은 노래하는 詩人·墨客이라면 吟風弄月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그만큼 이 언어는 풍류객의 전용어가 되어 있고 유유자적의 대표적 생활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吟風弄月이 거의 없어졌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실바람이나 소슬바람을 피부에 느끼며 이를 정감 있게 詩로 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파트나 빌딩 숲에서 몸에 부닥치는 바람이 있다면 돌풍이나 태풍 정도가 될 것이고 아니면 고약한 냄새를 가져오는 惡風이 있을 뿐이다. 달도 마찬가지다. 미세먼지와 연기로 가득 찬 도시 하늘에 그럴듯한 달이 떠 있는 날이 드물다. 도시 사람들은 달이 나와 있는지조차 모르며 지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연에 대한 정서는 평소에 메말라 있다가 하계 휴가철 잠시 도심을 떠나 산이나 바다로 나갈 때 비로소 바람과 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정도로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陰風은 스산한 바람이다. 한기와 더불어 사용될 수 있는 陰風은 흐린 날에 음산하고 싸늘하게 부는 바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한, 을씨년스럽게 부는 바람이라고도 한다. 정비석의 수필 「山情無限」에서도 암시적인 표현을 하였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쏼쏼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소리만도 아니요, 물소린가 했더니 물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비석은 陰風을 몸이 느끼는 산의 호흡으로 받아들였다. 陰風은 바람이라고 하기보다 氣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淫風은 음란한 바람이 아니고 음란한 생활이 확대 전파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淫風을 강력히 막았다. 서울에는 남대문·동대문·서대문이 있는데 北大門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본래는 있었는데 산속에 있어 왕래하는 사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북문, 북청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肅靖門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은 예나 지금이나 통제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경호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통제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淫風 때문에 폐쇄되었다고 한다. 여인네가 이문을 세 번 나서면 액운이 없어진다는 낭설로 인해 부녀자들의 출입이 빈번해지고 이에 따라 사내들의 수작도 오가 도색풍경이 벌어졌다고 해서 없앤 문이다. 그래서 淫風이 부는 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淫風은 인터넷을 통해 자연스럽게 분다. 누구도 통제하지 못할 무시무시할 힘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도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발생한다.
蘭의 한 품종으로 吟風이라는 風蘭도 있다. 주로 일본의 愛蘭人들이 감상하는 蘭인데 왜 吟風이라는 이름을 지었는지는 확실치 아니하나 風蘭의 상위단계이기 때문에 吟風이라고 했을 법도 하다. 음풍은 한글로는 같은 말이지만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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