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의 바람
음식 말리기 도우미, 바람
우리 조상은 음식을 장기간 보존하는 생활의 지혜를 많이 터득하고 있었다. 저장하는 것도 단순한 보관이 아니라 맛과 모양을 유지하고 영양가를 높이는 방법을 강구 하였다. 생선과 채소를 바람이나 햇볕에 말리어 부패를 방지하고 철에 상관없이 먹을 수 있게 하는 방식도 한 수단이었는데 요즘에는 냉장과 냉동 기술의 발달로 점차 그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추세지만 식도락의 한 기둥만은 유지하고 있다.
바람이 많아 옛날에는 풍대리로 불렸다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는 우리나라 황태 소비량의 70%에 해당하는 연간 25억 마리의 황태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황태는 명태를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용해 강원도 산간 눈 속에서 건조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소양호에서 형성된 차고 건조한 바람이 백두대간을 넘어가면서 명태를 말려줌에 따라 새로운 명품이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속에서 바닷물고기를 잡은 것이 되고 말았다. 용대리 사람들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무섭지 않다. 오히려 살을 에는 바람이야말로 풍요로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마치 인동꽃을 피우듯 역경을 이겨낸다고 한다.
생선은 주로 햇볕에 말리지 않고 그늘 속의 바람에 말려야만 제 맛이 난다고 한다. 바람에 말리는 대표적 생선은 황태와 오징어라 할 수 있다. 황태는 산속에서 말리지만 오징어는 바다 마을 주변과 도로 또는 집안에서도 말리고 있다. 원양어선이나 창고에서 기계를 이용해 말리는 오징어는 가정에서 응달의 바람에 말리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맛 차이가 난다고 한다. 강원도와 제주도의 관광지 도로에서 오징어를 줄줄이 걸어놓고 말리면서 관광객을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오징어를 손으로 펴서 말릴 때 막대기 구멍이 나게 되는데 그래서 공장 제품 오징어도 억지로 구멍을 뚫어 수제품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말은 그만큼 씁쓸함만 더하게 한다.
과메기도 바람에 말리는 생선이다. 과메기는 본래 청어를 새끼줄로 엮어 동해바다의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렸다가 녹이기를 반복하며 꼬들꼬들하게 말린 것을 말했는데 청어가 잡히지 않아 지금은 꽁치로 대신한다고 한다. 포항의 구룡포 지역 일대는 겨울철 차가운 북서풍과 동해바다의 남서풍이 다각적으로 교차하는 곳이어서 과메기 만들기의 적지라고 평가받고 있다. 구룡포의 바람은 청어나 꽁치 내장 속 기름과 맛을 몸통 안으로 스며들게 하고 소금기를 넣어 적당한 간도 해주며 맛나게 보이도록 반짝이는 빛도 보태 준다. 참 좋은 바람이다.
멸치와 문어 그리고 쥐치포 등 많은 건어물이 바람 신세를 지며 바다를 떠나서도 오랫동안 사람의 입맛을 맞추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생선뿐만 아니라 채소와 과일도 다양한 방법으로 말리는 기술을 사용하였다. 그 중 압권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곶감이다. 호랑이로 겁을 주어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가 곶감 소리에 울음을 멈췄다 하여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하는 곶감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들어져 사용되었었다. 곶감은 제사상의 중요 과일이기도 하지만 간식이 없던 옛날에는 아주 요긴한 물품이 되었었다. 오늘날에는 상주나 영동지역 등지에서 특산품화 되어 있는데 곶감은 약간의 보통 바람만 있어도 되기 때문에 바람 많은 지역이 아니라 감나무가 많은 지역에서 주로 생산된다.
식생활과 밀접하게 바람에 말려 저장했다가 먹던 음식은 매우 많다. 정월 대보름 오곡밥과 같이 먹던 나물을 보면 무엇을 말렸던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가지, 토란대, 고구마순, 애호박, 고춧잎을 비롯해 무말랭이와 시래기 등 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평상시 먹던 채소 등을 말려 저장했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한반도가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지방에 자리 잡고 있어 겨울철에는 먹을 것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청국장과 같은 장류의 발달과 더불어 말린 음식을 개발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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