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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문

곰나루를 회상하며

 

 

어릴 때와 학생 시절 금강 변에 자주 가서 놀았다.

물놀이도 하고 조개도 잡고 낚시도 했다.

강 가까운 곳의 모래밭에 땅콩 이삭 주으러도 갔었는데 그 곳은 바로 곰나루 옆이었다.

 

 

 

 

 

강 건너편 우성면 도천리 인근 주민들은 공주 시장이나 관청으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곰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야 했다.

그래서 곰나루 가기 전 모래사장 끝지점에 뱃사공의 집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뱃사공의 딸이 봉황국민학교 동기 동창생이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바로 처녀 뱃사공의 주인공이었지만 당시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가난하고 20리나 되는 먼거리를 통학하는 등 어렵게 사는 사람이라고만 생각되었을 뿐이다.

 

 

 

 

두 집 사이가 배 대던 건너편 나루터 - 옛 시절 곰나루를 회상하며 시를 써 본적도 있다.

 

 

사라진 나루터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사공의 손은 부르터야 한다 산마을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누구네 집 아이가 넘어진 일에서부터 새로 온 면장의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쉴 사이 없이 주절댄다 사공은 묵묵히 듣기만 하면서 노를 젓는다 노가 뱃전에 부딪치는 소리는 묻혀버린다

 

배삯은 일년에 보리 한말과 쌀 한말로 두 번에 걸쳐 해결한다 9살 된 어린아이도 때론 사공을 대신하여 배를 이끈다 강줄기 물 흐름을 제대로 알고 키 보다 큰 노를 휘젓는 모습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아플 때는 꼭 나온다 배는 콩알 만한 아이의 말을 잘도 듣는다

 

나루터에 자리잡은 사공의 집은 왜 모두 오막살이여야 하는가 싶다 사공네 집은 울타리도 없고 싸리문도 없다 부엌문은 항상 열려 있고 문풍지는 바람에 찢어져 덜렁거린다 새끼줄에 널어놓은 빨래는 절반 가량이 땅에 떨어져 있다 누렁이 한 마리만 햇빛 받으며 졸고 있다

 

배 건너던 자리에 다리가 놓여져 있다 사공네 집은 흔적도 없고 뱃터도 없으며 나루라는 말도 사라져 버렸다 강은 물이 줄어들었어도 그대로 흐르고 있는데 배는 없다 다리 위로 차들만 경주하듯 질주한다 사공의 어린 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공은 강 옆에 묻혀있을까!

 

 

 

 

공주의 본래 옛 지명은 웅진이었다.

웅진은 곰熊 자 나루津 자 해서 곰나루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공주의 근본이 곧 곰나루에 있는 것인데 곰나루가 우리나라 북쪽과 남쪽을 잇는 금강의 건널목이었기 때문이다.

웅진이 웅주로 다시 곰주로 바뀌었다가 공주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큰 고을이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충청도의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경부선과 호남선 철로 분기점 설치를 당시 양반들이 극렬 반대하여

사람들이 살지 않는 한밭이란 동네에 역을 만들어 대전이 만들어졌고

1932년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했기 때문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곰나루 동쪽편에는 솔밭이 있다.

소나무 숲이 무성한 곳은 각급 학교에서 소풍 가는 장소가 되었다. 

공주중학교에 다닐 때는 매년 2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소풍 갔던 기억이 남아 있다. 

 

 

 

 

솔밭 입구에 사당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름하여 웅신단 [熊神壇] 

 

 

 

 

예전에는 웅녀사당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바로 곰나루의 전설이 묻어 있는 곳이다.

허물어져 가던 사당을 새롭고 크게 단장하여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아득한 옛날 지금의 곰나루 근처 연미산()에 큰 굴이 있었다. 이 굴에는 커다란 암곰이 한 마리 살았다. 나무하러 나온 사내가 그 암곰에게 납치되어 굴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사내는 곰의 감시로 도망치지 못하고 곰이 사냥해 온 먹이를 함께 먹으며 살았다. 그러다 두 번째 새끼까지 낳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사내를 믿기 시작한 곰이 동굴 입구를 막지 않았다. 그러자 사내는 암곰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탈출했다. 강변 쪽으로 도망가는 사내를 발견한 곰은 두 새끼를 데리고 강변으로 달려가 돌아오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내는 곰의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넜고, 그것을 보고 있던 곰은 새끼들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사내가 건너온 나루를 고마나루 또는 곰나루[]라고 불렀다 한다.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보이는 산이 곰이 살던 연미산이다.

곰나루는 한양과 부산 또는 목포를 연결하는 중요 통로이기 때문에 통행량이 많았는데

물살이 거세어 나룻배가 뒤집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웅녀의 혼이 나루에 숨어 있어 배를 뒤집는다고 생각하고 곰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사당을 지었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 이후는 사고가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루 이름이 곰의 한이 서린 곰한나루였다가 고마나루로 다시 곰나루로 되었는데

공주시에서는 고맛나루라는 상표를 만들어 쌀 등 농산물을 비롯한 모든 특산물에 이 이름표를 달았다.

 

 

 

솔밭에는 웅녀와 새끼곰 2마리를 상징하는 조각품을 설치해 놓았다.

일부 학자들은 곰나루 전설과 단군신화를 연결시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토템 사상이라고도 하고 한민족의 고대 근원인 홍산문화가 한반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도 한다.

 

 

 

이제 곰나루 솔밭은 관광지가 되었다.

이름도 고마나루로 정착시켰고 유명 경승지로 만들어 금강6경에 포함시켰고 국민관광단지도 조성했다.

가까운 무령왕릉과 연계해 국립박물관도 인근으로 이전하였고 한옥마을과 종합운동장 등 각종 시설도 들어서

논과 밭이었던 곳이 완전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연미산에는 곰의 전설 말고도 또 하나의 전설이 숨어 있다.

백제가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부여풍이 항복한 곳이며

웅진도독부 설치와 관련 당나라의 유인궤와 신라의 문무왕 그리고 의자왕 아들인 부여융이 회맹을 한 곳이라고 한다.

 

 

 

   

곰나루 주변의 금강 변은 모래밭이 넓은 모래사장이라서 축구와 같은 운동경기를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갈대밭으로 바뀌었다.

 

 

 

 

강도 훨씬 넓어지고 물도 많이 고여 있는데

이는 곰나루 바로 아래 하류 지점에 공주보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공주보가 관광 명소로 등장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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