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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문

화암사 가는 길


고찰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 절 또는 오래된 절이라는 말인데 실제 보게되면 알록달록 화려해서 얼마 되지 않은 느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실제로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절을 보았다.

 



절이 있는 불명산이라는 산 이름도 그렇고 화암사라는 절 이름도 모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이 있는 곳이다. 



전국 대부분의 절을 가려면은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도로를 따라 걷게된다.

비록 먼지나는 자갈길도 있지만 거의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절 안에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는 계곡의 물길을 따라 좁은 길이 나있어 물소리를 듣고 가야 한다.



다리도 통나무로 만들어졌다.

느낌부터 다르다

여긴 화장 안한 순수한 자연미가 곳곳에 넘쳐나는 곳이다.



길 초입에서 시들어져 가는 얼레지라고 부르는 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이미 꽃은 사라지고 잎사귀만 쫙 깔려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몇일 전에는 이 지역에 얼레지 꽃밭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화암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불명산 기슭에 있는 절인데 

들어가는 입구 동네 이름이  싱그랭이 마을이라고 한다.

싱그랭이라는 이름이 어떤 뜻인지 찾아보았지만 나온 자료가 없다.

참 궁금한 이름이다.



통나무 다리인데 나무로 난간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다.

조금 경사가 있어서 위험성을 고려한 배려가 아닌가 한다.



급경사는 아니지만 약간은 높은 산길을 계곡 따라 계속 올라간다.



다른 쪽에서 내려오는 지류다

작은 폭포들이 많이 있다.

가천리라고 하는데 아름다운 냇물이 모두다 여기서 시작하기 때문인 모양이다.



물소리가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도 매우 차가웠다.



비탈이 조금 가파라지기 시작한다.

쇠기둥과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위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공미를 보여야 했나보다.

절벽엔 진달래가 피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천천히 자연을 만끽하고 걷다보니 30여분 지난 것 같다.

멀리에 2단 폭포가 보인다.



멋진 모습이다.

이런 경치가 서울 근교에 있었다면 난리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긴 사람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폭포를 따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져 있다.

안내판에 보니 계단이 147개라고 되어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폭포의 모습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거의 다 올라왔는가 했는데 또 다른 폭포가 보인다.

계단 밑으로 떨어지는 폭포다.

폭포를 바로 가로질러 계단이 놓여져 있어 잘 보이지는 않는다.

공사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기왕 어려운 공사를 할 것이면 중국처럼 절벽에 가교를 만들어 폭포 위를 지나는 것은 삼가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계단이 끝나 절로 가는 입구에 전형적인 소폭이 나타났다.

안내판에 섬진강 발원지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가 진짜는 아니고

섬진강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에 있는 팔공산의 데미샘이라고 되어 있다.


  

길가에 막 피어나는 얼레지가 있었다.



얼레지 사진을 찍고 있는데 등산객 한 사람이 올라온다.

폭포를 배경으로 한 절 입구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절간 앞 언덕에는 싱싱한 얼레지가 많이 있었다.

현호색과 산괴불주머니 같은 야생화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만 일단 절부터 보기로 한다.



낡은 절의 정문이다.

일주문도 없고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도 없이 막바로 절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지붕 밑에 불명산화암사라는 간판만 있을 뿐이다.




이 건물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화암사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화암사는 서기 694년(신라 효소왕 3년)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부분적인 중건 중수를 거쳐 1425년(세종 7) 해총()이 중창하였다. 불명산의 원시림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이곳에서 원효, 의상대사가 수도하였고, 설총이 공부하였다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다.



본전 들어가는 입구가 이렇게 좁다.

확실히 조용한 곳인 모양이다.



세월을 느끼게 하는 어북이 우화루에 걸리어 있다.



우화루의 안쪽 모습인데 아무것도 없다.

비움의 미학을 여기에 놓아 둔 모양이다.



화암사 본당 모습이다.

여긴 대웅전이 없이 극락전이라는 아주 작은 암자 형태의 본당이 있을 뿐이다.



극락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마침 스님이 나타났다.



책을 들고 가는 것을 보니 독경을 할 모양이다.



극락전은 1425년에 세워진 불전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맞배집으로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극락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전통적인 탱화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고승들의 영정 7폭을 보존하고 있다.



어느 시인은 화암사를 노래하면서 "잘 늙은 절"이라고 했다.

단청을 거부한 이 사찰에 대해 어느 답사가는 "가장 옛 얼굴을 간직한 순수한 자태"라고 칭찬하였다.



 15세기에 쓰인 〈화암사중창기〉에는 화암사로 가는 길이 "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려운 절"이라 묘사되어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던 백문절은 화암사에 대해 7언 40구의 길고 긴 한시를 남겼다고 한다.

지금도 풍경 소리만은 여전하다.



극락전 옆에 있는 적묵당이다.

요사채를 겸해 다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다른 두 건물과는 달리 신축한지 오래되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고 있어 조화를 이루었다.




뒷편의 모습이다.

굴뚝같은데 이곳은 깊은 산골이라서 겨울에 엄청 추울 것이다.

땔감도 필요할 터이고 식량은 또 어떻게 조달했을 것인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화암사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절 앞 언덕에 얼레지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하얗게 보이는 것도 있다.

흰색 얼레지는 아니고 그냥 색이 바랜 것 같았다.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가진 얼레지가

심심산골에 있는 절간 앞에서 치마를 저렇게 들추고 있으면 절에서 수양하는 스님들은 어쩌란 말인가.

아마 도를 더 닦을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얼레지 동산 옆으로 산괴불주머니와 현호색도 많이 피어 있었다.



이들은 사는 곳을 공유하나 보다.



현호색의 자태



산괴불주머니의 미소



돌틈엔 개별꽃도 보인다.



절 옆에 있는 폭포를 다시 보면서 내려간다.

화암사는 지금까지 본 사찰 중에서 가장 운치있고 순박한 절이었다.

절로 가는 길은 단연 산책하기 최고의 분위기라고 주장하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복사꽃이 피어 있었다.



멀리 벗꽃 남아있는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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