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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문

티무르제국의 영혼이 있는 사마르칸트

 

중앙아시아의 우즈벡키스탄에서 2번째로 큰 도시가 사마르칸트이다.

14세기 초 사마르칸트는 서차카타이한국의 수도였고 실크로드의 서쪽 관문으로 당시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마르칸트로 가기위해 고속열차에 탑승하였다.

이 열차는 독일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마르칸트까지 시속 약 200km로 달려 2시간 30분 걸린다고 했다.

 

 

 

고속 열차의 매 칸마다 승무원이 나와 친절하게 영접하며 인사를 한다.

 

 

 

우리나라의 KTX와 비교해 보면 훨씬 불편하다. 의자의 크기나 배치도 그렇지만 열차가 매우 덜컹거린다. 의자가 절반은 역방향으로도 배치되어 있다.

산과 강이나 냇물 등이 별로 없어 평지에 그대로 레일만 깔아도 흔들림 없이 평탄하게 운행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옛 철로를 그대로 쓰기 있기 때문에 철로의 이음쇠 등으로 인해 소리가 요란하다고 했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모습은 대부분 사막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멀리 천산산맥의 설산이 보이기도 했으나 조금 지나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평지로 이어진다.

중간 중간 야산 같은 모습이 있기는 했으나 산이 아니고 나무도 없는 언덕에 불과했다.

평야는 대부분 농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주로 목화나 사과 등 과일나무을 재배하고 있다.

 

 

오아시스의 도시인 사마르칸트에 도착해서 나오니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는 사막의 오아시스 정도가 아니라 번화한 도시가 된 모양이다.

 

 

 

사마르칸트 시내를 알려주는 지도가 그려져 있으나 글자를 모르니 전혀 도움이 안된다.

 

 

소형 버스는 형태가 비슷했다. 관광용은 그래도 성능이 좋은 편이라 한다.

 

 

우리는 현지가이드에게 현지식 중 식당이 아닌 개인 가정집에서 맛을 보고 싶다고 요청하여

사마르칸트 시내의 한 버스기사 운전사 집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집안 마당에 식탁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였는데 우리를 위해 특별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해본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주인과 딸 그리고 할머니는 식탁 근처에 오지 않으려 했다. 서빙은 일하는 사람과 가이드가 했다.

 

 

어쨌거나 일반식당에서 먹는 현지식보다는 훨씬 좋았다.

현지인들이 먹는 빵 리뽀슈카를 비롯해 만두국과 생야채 및 사라다 그리고 우즈백 볶음밥인 쁠르프 등 음식이 너무 많이 나와 다 먹지도 못할 정도였다.

마당에는 뽕나무가 심어져 있어 오디가 식탁으로도 떨어졌다.

 

 

 

 

 

 

 

 

 

 

 

 

 

 

 

아미르 티무르제국의 왕비가 건립을 완성시켰다고 하는 비비하눔 무스크를 관람하게 되었다.

티무르는 1336년 사마르칸트에서 약간 떨어진 케슈마을의 한 족장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때 아버지로부터 거대 국가를 이룬 몽고의 징기스칸 혈통이라는 말을 듣고

세계정복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에 부족장이 되어 동서 차카타이한국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징기즈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절름발이 티무르(Timūr, 1336~1405)가 차가타이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정복의 시대를 열었을 때는 사마르칸트가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동서양을 잇는 중요한 지역으로 정착했을 무렵이다. 티무르는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무자비한 군주였다고 한다.

티무르는 몽고적인 전통에 이슬람적인 윤리를 결합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낸 천재적인 사령관이었는데 14세기 후반에 러시아 내륙에서 북인도까지, 중국의 변경에서 시리아와 소아시아 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대륙을 정복하였다.

 

 

 

 

                                                                                                            <아미르 티무르>

 

 

 

사마르칸트 대학의 한국어과에 다닌다는 학생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곳에도 한류 열풍이 꽤나 있는 모양이다.

관광객들이 다니는 중간 중간에 어설픈 한국말이 들려 왔다.  가이드도 사마르칸트 대학 한국어과를 나왔다고 했다.

 

 

티무르 왕비가 왕이 전쟁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이슬람 사원을 완성시키려는데 대해 이런저런 전설이 얽혀 있다고 했다.

건축공의 왕비에 대한 사모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비비하눔 사원이 부실공사였다는 것을 은폐하려는 사연도 있을 것이다.

 

 

정복자 티무르는 정복과 파괴만 계속하였고, 이슬람 신자라는 사실 외에 자기의 개인적인 좌우명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확장하고, 큰 건물을 짓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제국의 다른 방면의 발전에는 무식했기 때문에 전해지는 다른 문화가 없었다.

 

  

 

티무르는 69세에 중국 그러니까 당시 명나라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중국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중앙아시아가 유럽과 아시아의 중심에 섰던 때가 바로 티무르 당대에 의해서였을 뿐이다.

이로인해 사마르칸트 주민은 물론 우즈벡 국민 모두가 티무르를 영웅시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티무르의 관이 놓여져 있다.

그가 죽은 뒤 투르크 부족은 찢어지기 시작했고 지역별로 자치를 강력히 희망하여 결국 티무르(Timūr)조(朝)(1370~1506)의 영토,

즉 이란과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은 티무르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나누어졌을 뿐 여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은 실종되고 영향력도 잃어버렸다.

 

 

 

 

레기스탄 광장으로 갔다.

모래의 땅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있는 산 마르코 광장처럼 동쪽, 서쪽, 북쪽으로 건물이 세워진 ㄷ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좌우 2개의 건물이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 ‘마드라사’로 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 레기스탄 광장에 들어선 건물은 서쪽에 있는 울루그베그 마드라사인데 당시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던 티무르의 조카 울루그베그 왕이 1420년에 건립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던 울루그베그 왕의 이름을 딴 학교가 완성되자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는데 처음 가르치기 시작한 학문은 이슬람 신학이었지만

곧 천문학, 철학, 수학, 과학 등 여러 분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2개의 미나레트가 남북으로 서 있는 울루그베그 마드라사는 직사각형 건물로 규칙적인 아치 모양의 입구가 있는 수많은 방과 아담한 정원을 갖고 있다.

티무르 왕조를 상징하는 꽃문양과 코란의 글귀로 장식되어 있고, 전체를 푸른 타일로 꾸며 놓았는데 매우 아름다워 누구나 탄성을 토해 낼 정도이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정면에는 천문학자이자 왕인 울루그베그를 상징하는 별 문양들이 장식되어 있다.

 

 

가이드의 아내가 건물 중간 중간에 있는 토방같은 공간에 토산품점을 개설했다고 한다.

마침 학교가 끝나 그의 딸이 나와 있어서 안아보고 있다.

 

 

 

 

황금으로 장식딘 이슬람 사원 내부이다.

지금도 라마단 기간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사용한다고 한다.

 

 

 

티무르의 죽음과 동시에 제국도 사라졌다. 그의 아들 호라산 총독 샤루흐(Shāh rukh, 1405~1447)가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한때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를 통합했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다시 분열되었다. 얼마 후 그의 증손자 아부 사이드(Abū Sa'id, 1451~1469) 때에 또다시 티무르의 영토를 재결합하여 막강한 국가가 되었으나, 이미 오스만 제국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티무르제국은 건물 양식뿐만 아니라 행정 기구의 공용어도 페르시아 어를 사용하였다. 이 왕조는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일어난 최후의 나라였는데 그 이후 무슬림 세계는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Babur)가 세운 인도의 무굴(Moghūl) 제국(帝國)(1526~1858), 시아 이란의 싸파비(Safavi)조(朝)(1501~1732) 및 오스만 제국(1281~1924)으로 나뉘어졌다.

 

 

 

사원 바로 옆에 재래 시장이 있었다.

티무르제국 당시에서부터 만들어진 시장이라고 하며 600년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시장 구성은 건과류 종류와 채소 종류 등 2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었는데 모두 콘크리트 건물로 만들어진 신형이다.

 

 

 

 

 

 

이곳에는 붉어진 후 검게 변하는 오디 말고 흰색 계열의 오디가 특색이다. 모양은 벌레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당도는 검붉은 것보다 훨씬 강했다.

 

 

우즈벡 사람들도 밀을 많이 심고 주식도 빵이다.

그런데 사마르칸트의 빵이야말로 우즈벡 내에서 가장 맛있다고 하여 타쉬켄트로도 공급한다고 한다.

 

 

 

 

 

어느나라이던 재래시장을 보아야 그 곳의 현재 실정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마르칸트의 시장에서 이 지역의 문화정도를 측정해 볼수 있는 것이다.

 

 

 

 

구두 수선공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의 60-70년대 수준으로 아직은 경제수준이 낮은 국가임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 벽화가 있는 한 박물관인데 정전으로 인해 손전등을 키고 관람하여 자세히 보지 못했고 사진도 찍지 못했다.

이 아프로시압박물관에 있는 유물 외에도 사마르칸트의 지하에는 많은 유적지와 유물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박물관 뒷편에 있는 구릉지인데 지하에 옛날 도시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경제사정이 나아지면 여기저기 발굴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하에서 오래된 포도주가 발견된 곳에 다시 세워진 와이너리에 들렸다.

 

 

 

 

와인과 꼬냑 그리고 약술까지 합해서 10잔을 시식하였다.

처음에는 알콜 8도부터 시작해 마지막 약술은 45도라고 하였다. 10잔은 취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저녁 식사는 양고기 요리 중심으로 마련되었다. 사실 맛은 별로였던 것 같았다.

특별 주문을 해 놓았지만 가이드가 말을 듣지 않고 제 입장만 챙기느라 사전에 준비한 뻔한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무희가 춤을 추고 있다. 음식 맛을 내게 하는 것인지 치마를 흔들어 먼지를 내게 하는 것이지 모를일이지만.......

 

 

 

 

 

 

밸리댄스를 하고 난 후 식탁 주위로 몰려다니며 돈을 뜯어내고 있다. 짐짓 모른척 외면하려는 일행의 표정에 웃음이 나온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지나친 상습범으로 보여 별로 편한 느낌은 들지 아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