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 이선은 조선왕조 21대 왕 영조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일찍 글자를 터득하고 학문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어난지 14개월만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5세에 임금의 대리청정을 맡았지만
당시 극심했던 당파 싸움의 한 희생양이 되어
26살에 뒤주에 갇혀 일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는 죽어서 세자가 아닌 일반인 무덤의 이름을 사용해야 했는데
동대문구에 수은묘란 이름으로 안장되어 구천을 떠돌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들 이산은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그가 정조라는 왕이 된 후
왕족이 사용하는 무덤 이름인 원을 써서
영우원으로 높여 불렀다가
다시 수원화성부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현 주소로는 경기도 화성시 병점구 효행로 481번길 21에 소재한 현릉원은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난 후 합장되었다가
1899년에 사도세자가 왕인 장조로 추존되면서 무덤의 이름이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영조이기에
사도세자는 40년간을 왕의 아들로써 수행을 했어야 했기에
일찍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말도 있지만
뒤주에 갇혀 죽었기에
그의 영혼은 단종 보다도 더 비참한 일생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죽어서도 세자의 대우를 못 받고 있다가
뒤늦게 왕릉 속에 들어가 있지만
아주 다행인 것은 아들 이산이 지극하 효자라서 오히려 더 행복한 혼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들 정조는 융릉을 만들면서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꺽정하는 마음에서
릉 앞에 아무 건물도 보이지 않고 시원하게 보이도로 했다고 한다

정조는 수시로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인사 드리기 위해 융릉을 찾았는데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팔달산 아래에 숙소(화성행궁)를 만들어 임시 머물어야만 했다

그래서 부인 혜경궁 홍씨가 화성행궁에 머물게 되었고 정조는 어머니를 모실 겸
더욱 더 화성행궁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로 인해 사도세자의 혼백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이라는 성곽을 건립하여 한양도성의 작은 왕궁 터를 만들어 놓은 후
임금의 거처를 옮기고 수도 이전을 계획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비운의 왕세자였기에
그의 혼백이 불쌍했지만
오늘날의 수원을 만들어 냈고
영조와 정조가 나라를 잘 다스리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에
오히려 나라에 공헌했을 것이라고 한다

단종의 애환이 담긴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대단한 인기를 얻은 것과 비교되어
10년 전에 나왔던 [사도]란 영화는 관심이 적었던 것과 비교가 될 것 같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