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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필과 산문

소설 습작용

 

 

 

 

 

출생일 1933년 癸酉年 음력 2월 19일 새벽 첮닭울고 좀지나서 (丑時)


단기, 4266년   日記, 昭和8년


출생지 平安南道 大同郡 柴足面 三山里 미르고개


미르고개에서 4,5세때 祥原郡으로 이사갔다

 여기에는 할아버지 땅이 좀 있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땅에서 농사짓고 양봉을 했다

두살쯤 된 동생이 꿀뜰때 꿀흐르는 곳에 오른손가락 대고 왼손가락 빨면서 아 달다 했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7세때 黃海道 遂安郡 水口面石達里로 이사 와 (이곳은 북한의 최대 金鑛産지역 笏洞鑛産)이곳에서 수구군민학교 입학


1년 다니고 9세때 평양시 紋繡里로 이사했다   


평양시 新栗公立國民學校로 전학  당시 통신부엔 甲乙丙으로만  표시했음


 단한번 6학년때 공작부분에서 甲받아봄


고무즐 감아 날리는 모형비행기를 전학년에서 최고로 만듬


1945년8월15일 해방 됨에 따라 9월초 입학 졸업으로 이어지게 됨으로 6학년을

1년 6개월 하게 됨에 따라 왜정 6개월 해방후 1년 했음  (1946년3월이면 졸업인데 45년 해방) 


국민학교 졸업후엔 진학 안하고 집에서 여러가지 공작노리 함


환등기 직접 만들어 동리 애들 밤에 모아놓고 환등보여주고


일본공작책 보고 전동기만들어 이모부에게 큰 친찬 받고 푸짐한 용돈도 받음


(당시 이모부는 평북 강계군에서 제일 부자였었음으로 해방후 숙청 당해 남한으로 월남 함) 

학교공부는 1년쉬고 선교리에있는 평양사범전문학교 내에 야간수업하는 동평중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해서 1년간 다니고 자퇴했다  공부를 그렇게 싫어했다


전기를 알게된것은 국민학교 5학년때 친했던 金永和의 형 김덕화씨가 평양에서는 라디오수리공 1인자였는데 광석수신기 3석자리 만들어 남한방송도 청취 했고 서북청년단 단원이기도 했는데 사변 직전에 공산당에 끌려간후 소식끊겨짐 그때 친구 영화네 집에 자주 나들면서 수신기도 들으면서 지선에 물을 부으면 소리가 더 커진다고 해서 물주다 크게 감전당한것이 게기가 되서 전기를 만지기 시작 했는데 전기는 +극과 -극이 있는데 +극 한선만  (그땐 100v였기에 다행)끌어다 지선과 부디치면 스파크가 일어나는데 스파크가 생길때 마다 이웃 모든 라디오에서는 크게 괴음이 난것이 재미있어서 철없이 전기장난을 하다 눈병이 심하게 났는데 (남한에 와서 알게된것이지만 )스파크가 날때의 불빛에는 아주 강한 자외선이 비쳤기때문인데 당시에는 몰라서 계속 전기장난 하는 바람에 눈병이 낫지아나 소련적십자 병원에가서 치료 받으면서도 전기 장난은 계속 했다

 

이때 +선에 코일선을 연결해 논 상태로 전기작난하다 밖에나가 놀았는데 세째동생이(당시세째동생 세살쯤) 코일을 손에 감고 땅을 밟는 바람에 큰일 날번 했는데 때마침 어머니가 옆에서 미싱하다 애가 크게 갑자기 우니 번적드니까 울음이 끝였는데 어머니가 전기감전인줄 알고 호되게 혼난적도 있었다  이일은 전기장난 초기에 있었던일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우집에 게쎴다 어머니 형제가 삼남매였는데 외삼촌한분은 첩과 진남포 먼데서 살았고 이모한분은 숙청당해 이남으로 월남한 상태여서 갈곳이라고는 우리집밖에였다 그러든 어느 봄날에 82세의나이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전에 살든 동리에 부고 전하고 철없는 내가 예전친구들과 히히낙낙놀다 해넘어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정치보이부요원에게 잡혀갔다  이유는 나도 모르는 일 다만 전차길로 팔장끼고 오는데 좁은골목에서 나와비슷한 애가 앞을 가로 질러 길건너 골목으로 도만 갔는데 내가 그앤줄 알았는모양으로 잡혀간것

 집에서는 초상나서 분주히 돌아가는데 訃告보낸 애가 안 들어오니 날리가난것

애는 없어도 장례는 치뤄야하니까

집에서 장례치르는 동안 나는 정치보위부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내게 참기힘든 고문을 가해 댔다 이틀동안 매를 맞고 먹지도 못하고 기운없이 2층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는 오후 4시경

외사춘형과 눈이 마주 쳤다 (내무서가 선교리에 있었고 1층은 내무서 2층은 정치보위부였음)

외사촌형(김 庸澤 당시 33~4세 전기회사 근무)이 내무서로 들어와 봤지만 내무서원에게 뭣을 알고 갔는지는 모른다 어째거나 내가 그곳에 있다는것은 알고 갔다

다음날 新里에서 깡패두목인 정봉이라는 사람이 다짜고자 내가 취조받는 방으로 들어 오드니 큰소리로 야 ? 너 어떻게 된거야 왜 여기 있어 하고는 취조하는 사람과 어쩌구 하드니 오후에 집으로 보내 줬다

집에서는 내가 온다는 소리를 미리 입수 했는지 어머니가 큰 두부 한모를 입에 타라막으면서 쑤셔 넣는다 영문도 모르는 나는 그저 방으로 들갔다

등은 온통 핏자국이고 멍이 심하다 어머니는 할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데 뒷집 아즘마가 애를 다두기면서 일부로 인기척 내면서  대문을 여고 들어 오면서 입에 손을댔다 

(당시 살든집 동네는 우리집 벽이 곧 뒷집 마당이다 당시에는 대문정도는 모두 열어놓고 살던때였고 밤에만 걸든때)

아무말도 하지말라는 소리다 차후 알고보니 내가 집으로 들어올때 뒷집으로 젊은놈이 우리집 벽에 귀를 대고 엿듣는것 몰래 방에서 보고 자는 애의 다리를 꼬집어 울려놓고 애 업고 우리집으로 마실 오는것 처럼 하고 와서 정보원이 귀대고 였듣고 있었다는것 알려줘 

그때 정치보위부에 끌려갈때 나이 겨우 16살 낮에는 조용히 지내지만 밤만 되면 지하에서 사람잡는소리가 시크럽게 들리곤 했다 저들은 밤잠을 안재우면서 매질 하면서 잊지도안은 거짓 인물이나 물증을 말하면서 했냐 안했냐로 때려 댔다 나오기 전날 그러니까 장례식하든날엔 낮에 국민학생의자를 돌려놓고 발을 등바자로 넣고 앉게하고 손은 뒤로 묵고 권총 총열을 쥐고 손잡이로 무릎을 내려 치는데는 참으로 참기 힘든 고문군 제대한뒤 청계천서 일할때 무릎에심한 통증있었음 그때 매 때문)

나중에 안 예기지만 용택이 형이 다녀간뒤 신리깡패두목 정봉이를 찾아가 애가 이렇게 됬으니 살려달라고 돈과 닭을 줬다고, 정봉이가 나를 돈받고 빼내준것이였다 그 루투를 찾는데는 우리집과 대문 마주한집 애들이 신리 깡패의 일원였는데 그애들에 소개 받은듯 싶다 그형제 이름은 황석찬 인찬이다 인찬이는 나보다 한살 위였다 대문마주 살았지만 인찬이하고는 한번도 같이 논적은 없었다

 

625나든해 2월달에 황해도 곡산군 청룡면 운암리 고종 누님네로 가서 眼疾 침술치료받았는데 시골 깊은곳이니 전기가 없어 장난을 못하고 5개월여 지나니까 자연이 조금씩 나아 져갔슴  그해 그곳에서 625발발 소식 듣고 집으로 오게 됨


그당시 雲岩里 작은 매형은 노동당 면당위원장이고 누님은 이당위원장이였기때문에 내가 그곳에서 인민군에 소집되면 외삼춘인 아버지에게 면목없이 되겠으니까 집으로 보내야 했는데

 당시 그곳에서 농산물을 배에 (대동강줄기) 싫고 평양으로 와서 팔고 생필품 가져다 시골에 팔든이가 있어 누님이 배 태워 평양으로 보냈는데 

3일째 간곳이 승호리 거진 왔을때 평양에 폭격소리가 들리니까

사돈되는분이 평양가면 폭격이 심한데 가겠냐 그러지말고 형님네로 다시 가리고 권하는바람에  해가 있어서 배에서 내려 길 떤난는데 아주 캄캄한 밥에 혼자 길 가자니 겁이 나서 많은고생한 생각이 지금도 나고 

누님네로 가려면 도강해야 하는데 야밤에 배도 없을꺼고 매형네 본가가있는 동리에서하는수 없이 혼자주무시는 사돈 할머니댁 문두두려 자고 다음날 아침에 강건너 누님댁에 왔는데 누님이 난처해 하면서 언니네로 가라고 했다 

 (작은누님댁은 곡산군이고 큰누님댁은 수안군 )인데 큰누님댁으로 가려면 곰재고라는 큰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 고개를 넘을때면 목구멍에서 쇳(쇠)비린내가 난다는 힘든곰재고개다

이곳은 비교적 동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여간 사람들은 고개 넘기를 꺼려 하는곳인 데도 불구하고 큰누님댁으로 와 있었는데

몇일뒤  면사무소에서 인구 조사를 하는 바람에 큰매형도 내가 인민군에 끌려가면 면목이 없을테니 집으로 가라는것

큰누님댁 턱골서 수구면석달리까지 거리는 20여리 석달리서 자고 평양으로 출발했는데 턱골에 있을때 신발이 변변치아나 오른쪽엄지발가락위에 상처가 생겼었는데 상처가 부어있었음에도 새벽에 출발해서 100리가 훨신 넘는거리를 걸어 오는동안

栗里라는 곳에서 내무서원에게 검문을 당했는데 그때 내가 건강했다면 인민군에 갔을지도 모르는데 엄지발가락에 상처와 눈이 시원챤은것 때에 내무서원이 보내주지 안았을까

(당시 걸어온길은 지금 다시 재본 거리가 북한지도상에서 걸어간 직선거리만 30km가 훨신 넘는데 길 따라가면 꼬불꼬불 자동차길이니 아마도 150리는 걸지안았을까

여관도 없는곳이고 일반 주막집에서 하릇밤 자기 원했더니 십리길이나 돠는 파출소에가서 신고 하고 와서 자라는것 

하는수없이 신고하고 와서 잣는데 점심도 저녁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지금에 와선 기억조차  없다

자고 다음날 일어나 걸으려니까 (아침은 주막집에서 조금 먹고 떠난듯 싶기도 하고) 오른쪽 무릎 오금쟁이에서 우지직하는소리가 나면서 어찌나 아픈지 엉금엉금 기다 시피 가면서 생각하

평양은 밤마다 폭격이 심한데 부모와 동생들이 아직 평양에 있을것인가 생각하다 평양서 30리 떨어진

평남 강동군 청룡면 소오류리 재당숙이 사셨는데 좀 돌아가지만 그곳으로 먼저 가 보기로 하고 가는데 해뜰때 출발한 걸음이 무릎오금쟁이가 어찌나 아픈지 30여리를 가는데오후1시경에 재당숙댁에 도착했다

당숙모가 날 보는순간 놀라 입을 꼭 다문상태로 곡간뒤 좁은 골목으로 끌어다 내던지듯 처 넣고 주위를 살피더니 시간 좀 지난뒤 나오라고 해 나와 차려주는 점심을 먹었는데 너무 힘드니 점심이 먹혀지지아나 못먹고

곧바로 장농문을 열고 이불 꺼내고 장농 위 천정을 옮겨놓고 천장을 저치고 올라간곳이 인민군 기피하기위한 골굴에  가쳤다 숨쉬기도 힘들많근 좀은곳이다 (이곳은 북한에서는 날씨가 차갑기 때문에 집 질때 덛집을 짓는데 낮은지붕 위에 본지붕을 만드는 방식이다 알기 쉽게 서까래를 2중으로 만들고 공간을 두는것)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내려와 한집건너 작은 큰아버지 집 사랑방으로 옮겨서 있었다 그곳에 부모 동생들이 피난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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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리미 큰아비네 집에 오게 된날은 7월3일이나 4일 아니면 5일쯤 되지 안았을까 그때부터 꼼짝못하고 매일밤낮 작은 큰 아버지댁 사랑방에서 지내면서 사랑방 바깟쪽으로 난 방문 밖에서 무슨 소리만 나면 뚜러논 바눌 구멍으로 내다보고 수상하다 싶으면 잽싸게 몸을 숨기곤하는 나날을 보내든 어느날 왜발 총소리가 들렸는데


좀지난뒤 동생이 나갔다 와서 하는말 (세 살 아래 동생 15살) 남쪽으로 부터 묶겨서 끌려온 사람이 강냉이밭으로 들어가라고 하드니 총으로 쏘니까 쓰러지드란 말을 한다


(당시 남쪽에서 의용군이나 반동으로 보이는 많은사람들을 북으로 이송하는 무리들이 지나가다 이곳 오류리에서 쉬어가곤 했음) 국              


그들중에 좀 귀챤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모두 총살하면서 이동했다


그러든 어느날 그러니까 10월18일 국군이 동내를 지나간다는 소리듣고 나갔는데 국군이 길양옆으로 줄지어 행군 하는 맨 뒷쪽엔 인미군포로로보이는 두사람이 그 무거은 장총 여러정을 메고 따르는 모습이 많이 힘들어 보였다 나도 국군의 배낭을 한 시오리 쯤 메다 줬는데 그시간이 해질무렵이라 국군이 돌아가라고 한다 (국군에 가담하고픈 감 있었음 따라간다고 하면 따라 가자고 하지 아났을까)

ㅅ음

집에 왔더니 그새 국군 정훈부가 동내 한가은데 엄청큰 확성기를 설치해놓고 유행가를 울려 주는데 해방전에 들어보든 유행가가 얼마나 감명 깊었는지 밤에는 간단한 공연도 보여줬다 인공이후엔 유행가를 불러보지 못했었음


다음날인 10월19일이 국군평양입성식 있었다


우리 온가족은 몇일은 더 묵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좀더 있다가 평양집으로 복귀 했다


몇일이 지난 어느날 오리미 7촌형이 찾아 와서 앞으론 영어를 알아야 된다고 선교리에 가면 남한선생(이화여대교수)이 응천영어강습소를 열었는데 가서 배우자고 해서 같이가 등록하고 얼마를 다녔다


집에서 영어강습소를 가려면 대동교에서 선교리역으로 이어지는 큰 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대동교에서 선교리 역까지의 거리는 약 150m정도라고 기억하는데 이곳엔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여러 가지 크고작은 폭탄을 종류별로 가슴높이 많금 4~5m넓이로 싸아 두었었는데


12월 2일밤 국군이 후퇴하면서 노획폭탄에 불을 지르고 간것이 밤새 터졌는데 작은 포탄은 큰것이 터지면서 날라와 부엌담 저쪽 어디에 떨어지며 터지니까 요란한 굉음을 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부억담이 조금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식구가 두터은 이불들을 뒤집어 쓴채 꼼자못하고 얼마를 지나 잠시 조용한 틈에 나와 그쪽을 보니 촛불을 켜논것같은 불길이 높이 솟아 있었다 온통 세상이 낮과같이 밝아있었다 잠시동안


집에서 도무지 견뎌낼 가능성이 없어보였는지 아버지가 식구를 데리고 큰길건너 외할머니 남동생네로 가 방공호에 들어가 있다가 날 샌뒤 집에와서 아버지께서 피난가야겠다고 떠난것이


12월3일 다행이 집에 라야까가 있어 간단한 짐 챙겨서 피난했던 오리미로 갔는데 두분 큰아버지도 피난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다음날 세집 식구가 남하하기 시작 한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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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3 06:15   

와~~
대단한 기억력이십니다.
이름과 장소를 한자로 적을 정도면 사소한 사건들도 모두 떠올릴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방식
그러니까 카페의 안쓰는 게시판을 위장막으로 사용하여 비망록으로 활용하는 착상이 기발하십니다.
서두르지말고 천천히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글을 쓰면서 의문나는 사항은 수시로 적어 놓겠으며 다 끝나면 지우시면 될 것입니다.)



2014/10/23 06:56       


시안용으로 큰 틀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제목; 평양을 떠난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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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애국 활동)
제1부-- 돌아갈수 없는 고향땅
제2부-- 방랑자로 살아 온 80년
제3부-- 산을 찾아 방황한 일생
제4부-- 갈증 해소를 위한 세계여행
에필로그(조국을 사랑하는 영원한 에뜨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