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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필과 산문

바위 조각하는 바람

바위 조각하는 바람

 

일도 정진하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아니랍니다. 이걸 운명이라 하는지도 숙명이라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석수장이의 원혼인지도 모릅니다. 바람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작업을 합니다. 수없이 많은 동작을 반복하면서도 같은 형태의 움직임은 단 한 번도 되풀이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숙달된 것도 아니고 실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바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답니다.

 

미리 구상한 것 없습니다. 바람은 배고픔에 울부짖는 사자의 사나운 표정을 표현해 낼 수 있었고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힘을 다해 도망가는 얼룩말의 긴박한 동작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습니다. 새싹의 희망을 담아 식물의 미래 모습을 그릴 수도 있었고 고목나무들의 회춘 모임 토론장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새들의 노랫소리도 꽃들의 속삭임도, 곤충의 통신 언어까지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모든 표정을 구사할 수도 있었으며 수많은 군중의 호흡과 감정을 비롯해 관음보살의 천수천안까지도 그에 맞는 각각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조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미리 작품 내용을 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때그때의 흐름에 따를 뿐입니다.

 

작품을 구상하지 않으니 비구상입니다. 추상적 작품입니다. 일상적인 모습이 없습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허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이상스러운 모습이 바람의 세계에서는 서로 잘 아는 작품으로 통하지만 굳이 이러한 사실을 주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정신세계 또는 내면의 이상을 표현했다고 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구름 모습을 놓고 보는 사람마다 평가나 의견을 달리합니다. 양털구름이니 새떼구름이니 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지만 사실 지구상에 실존하는 모습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추상적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람은 바위를 재료로 하여 조각을 함에 있어 특정적인 것도 같은 것도 없이 알 수 없는 모습을 표현해 냅니다. 바위가 조각을 할 경우 장소나 재료를 매우 중시합니다. 뛰어난 조각가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작품 활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조각가는 본인이 선호하는 환경을 중시합니다. 바람도 굳이 장소를 가리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면 막힌 곳보다는 넓게 탁 트인 곳을 좋아하며 지대가 낮은 곳보다는 높게 위치한 장소에 자리 잡습니다.

 

재료도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지만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과 바위를 주로 선택합니다. 다루기도 좋고 표현하기도 좋으며 무엇보다도 빠른 시간 내에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면 흙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보존기간이 짧다는 문제점이 있어서 어려워도 바위를 주재료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 하겠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없지만 바위가 영생을 상징하기 때문에 불멸의 바람은 장수의 바위를 선호하게 됩니다. 자연에서의 조각가인 바람은 또 다른 조각가인 물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물과 바람은 조각을 함에 있어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바람이 비교적 높은 곳에서 수직성의 작품 활동을 하는 데 비해 물은 지표나 지하를 흐르며 수평의 작업을 하는 등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조각가도 쫓아 올 수 없는 웅장한 규모도 그렇고 세월과 무관하게 끝없이 지속하는 작품에 대한 정열도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섬세한 작업을 통해 절제되어 표현된 아름다움과 고귀한 철학이 내재한 역사성과 예술성을 갖춘 작품들이란 인간이 감히 범접을 못할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깎고 다듬고 바위를 만지며 조각을 합니다. 만족이란 없습니다. 불만족이야말로 최고의 작품이 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으면서 작업을 합니다. 작업에 심취할 때는 무아지경에 빠지며 우주의 섭리를 바위에 담는 양 하늘과 땅이 일체가 되도록 합니다. 언제나 작업이 멈출지 모릅니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바위라는 존재가 바람으로 변화 될 때야 비로소 작품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