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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문

지리산 청학동에서 한민족의 근원을 가르치다.

지리산 청학동을 거론하면 상투 틀고 수염기르고 옛날 복장을 한 훈장이 어린이들에게 하늘천 따지를 가르치는 곳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청학동은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도선국사 등 유명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동방제일의 명지로 인정하여 선인의 도를 닦던 장소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지리산의 옛 이름은 두류산이었다.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백두대간을 따라 흐른 한반도의 정기가 마지막으로 집결된 지점이라 한다.

두류산은 선가와 불가에서 영악으로 인정한 곳으로 동은 천왕봉, 서는 반야봉, 중앙에는 영신대가 있어 병풍같은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영신대에서 남쪽으로 맥이 이어져 삼신봉을 만들고 삼신봉이 동서로 맥을 확장시켜 신선대, 삼성봉, 삼선봉, 미륵봉, 시리봉을 잇는 주변 40리의 청학동을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선가에서 흐르고 있는 가르침은 - 두류산 남쪽 기슭에 청학동이라는 천하제일의 명승지가 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는 폭포가 있으며

 

 

 

폭포를 지나면 외석문이 나오고 외석문에서 내석문을 지나 동굴같은 계곡을 십리쯤 들어가면 주위 사십리의 광활하고 평탄한 초원에 신선들이 살고 있는 별유천지가 나온다 - 라고 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입구에 폭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인공미가 보이며 물도 깨끗하지 못한 편이었다)  

 

 

 

검술 수련을 하고 있는 양각 조각작품인데 검이 부러져 있었다.

 

 

 

얼굴 조각품인데 주인공이 누구인지, 왜 만들어 놓았는지 설명이 없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장면에 대한 소개가 없어 답답한 편이다.

 

 

 

왼쪽의 조각상은 TV에 자주 등장하는 청학동의 대표 연예인이 되어버린 훈장 모습 같다고 평하였다.

 

 

 

청학을 상징하는 관리사무소 뒷편의 모습이다.

 

 

 

청학의 본래 모습인 모양이다.

봉황처럼 상상 속에서 태어난 새로 볼 수 있다.

 

 

 

검달길이라는 작은 팻말이 놓여져 있다.

폭포를 지나 마고성까지 이어져 있는 길이다.

 

 

 

급경사는 아니지만 계속 올라가야만 하는 길로 계단이 놓여져 있고

좌우측으로는 돌담과 돌탑이 쌓여 있다.

 

 

 

조금 더 올라가서 뒤돌아 본 청학동 입구 모습

 

 

 

중요한 문인 모양인데 설명이 없어 깊은 뜻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문 입구를 지나면 문을 상징하는 작은 터널을 지나게 된다.

 

 

 

문 천장에 새겨져 있는 그림이다.

 

 

 

둥그런 문장은 가림토문자 같으며 사냥 모습은 고대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 같은데

명쾌하게 답변을 해 줄 설명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힘차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고대 설화나 어느 나라의 신화에도 사슴머리를 한 장군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데

이곳에 위풍당당한 사슴장군이 서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터인데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깊은 산골에 커다란 호수를 가진 마고성이 나타났다.

 

 

 

선가에서는 -

신선들이 사는 별유천지에는 청학이 노니는 학연과 석정이 있으며 뒤에는 삼신봉이 높게 솟고 앞에는 백운산 삼신봉이 둘러처져 있으며 후록에 삼각삼봉이 병풍처럼 나열하고 해바위와 달바위가 있다

- 라고 전해진다고 한다.

  

 

 

선국은 마고성, 삼성궁, 삼신궁, 삼선궁, 신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고성은 선국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장소이다.

 

 

 

마고성을 지나는 너와집 안에는 삼신궁의 신위가 놓여져 있다.

 

 

 

마고성(麻姑城)은 신라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에서 있는 상상 속의 지역이다

아주 오래전 천지창조는 율려(律呂)로 일어났다. 율려를 통해 별들이 생기고 우주의 어머니 마고(麻姑)가 잉태되고 태어났다. 마고는 율려를 타고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무리가 1만2000명이 넘었을 즈음, 그들은 지구상의 가장 높은 곳인 파미르 고원 한 곳에 ‘마고성’이라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부도(符都)를 이루며 살았다.

 

 

신라시대 박제상이 쓴 역사서 ‘징심록(澄心錄)’의 한편인 ‘부도지’에 기록된 창세설화 ‘마고성 이야기’다. 마고는 지구 어머니를 상징한다. 지금까지도 제주도를 비롯하여 지리산, 강원도 삼척, 전북 부안, 충북 단양 등 전국에 마고와 연계된 구비설화와 지명들이 많다. 마고의 존재를 제천단, 사당과 같은 유적이나 산성, 바위산, 바위의 지명으로 남겨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전승된 내용과 형태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마고를 생명의 근원적 존재로 경배하고 모셨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를 통해 인간의 근원과 참됨을 지향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헤아릴 수 있다. 한민족의 삶과 생활 속에 마고성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 본능, 복본(複本)의 정신이 이어져온 것이다.

 

 

마고성에서 삼성궁으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많은 장승들이 세워져 있다.

마고의 전설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고성에 사는 이들은 품성이 조화롭고 깨끗하며 하늘의 소리를 들 수 있었다고 한다. 율려를 체득하여 자신과 우주가 하나임을 알았으며,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구속과 강제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천성(天性)을 따라 평화롭게 살았다. 마고성에서 인성은 곧 천성이었다

 

 

 

그런 이들이 어느 날 포도를 맛보고 오감이 깨어나자 맑고 순수한 본래의 천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욕망과 감정으로 서로 다투고 시기하여 마고성이 매우 혼란스러워지자 마고성의 장자인 황궁씨는 마고성을 보존하기 위해 모두가 성을 떠나 이주할 것을 명하였다

 

 

 

황궁씨 자신도 네 무리 중 한 무리를 이끌고 지금의 동아시아지역에 해당하는 북쪽 천산주에 정착했다. 그리고는 마고성과 같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다시 세우겠다는 복본의 서약과 함께 하늘의 징표인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첫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복본의 의미가 담긴 천부삼인은 그렇게하여 황궁씨에서 유인씨에게 다시 한인에게로 전해졌다. 한인은 한웅의 아버지이며, 한웅은 홍익인간 재세이화 이념으로 이 나라를 세운 국조 단군의 아버지이다.

 

 

 

새로운 지역이 나타난다.

삼성궁을 모신 넓은 땅이 깊은 산 속에 있었다.

 

 

 

 

까치수염이 악세사리로 등장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건물이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주막은 아닌데 위치만은 주막이다.

 

 

 

앞에는 많은 장승들이 서 있는데

아래가 많이 상한 것을 보니까

서 있은지 꽤나 오래된 것 같다.

외다리가 많이 아프겠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지리산 능선을 배경으로 설치된 정자의 자태가 우아하다.

 

 

 

어느 집으로 가는 돌담길이 고즈넉한 모습이다.

 

 

 

꽤나 괜찮은 기와집인데 폐허가 되어 있다.

 

 

 

아마 수행하는 도반들이 머물던 곳 같기도 하던데

창문은 찢어지고

도깨비 바람만 가득 차 있다.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작품 사진으로 활용하고 싶어 찍어 놓은 장ㄷ면이다.

 

 

 

건국전 앞에 조성해 놓은 연못이다.

 

 

 

 

노랑어리연이 많이 피어 있었다.

 

 

 

 

삼성궁의 신전과 같은 건국전이다.

좀더 웅장하고 권위를 느낄 수 있게 건축해 놓았으면 좋았다는 느낌을 갖게 했지만

깊은 산속에 이만한 건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기에 그래도 다행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건국이념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의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단군왕검은 3번째로 순위가 내려와 있다.

 

  

 

국조 삼성 한인, 한웅, 단군을 모셨다는 삼성사는

고려시대 제왕운기를 비롯하여 많은 기록에 남아있다.

삼성사는 북한 구월산에 초대단군 왕검임금께서 구월산에 신선이 되신 이후로 있어 오다가

일제에 의해 멸실되고 지금은 북한이 복원한 삼성전이 있고 남한엔 사다멸실 직전에

위패를 모셔온 낙천선사의 뒤를 이은 한풀선사가 소도를 복원하며 모시고 있는

삼성궁이 지리산 청학동에 있다

 

 

단군신화에는 환인과 환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한자식 표현을 하다가 잘 못 전해진 것이라 한다.

정확한 이름은 한인, 한웅이 맞다고 한다. 

 한인이나 한웅은 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지도자의 지위 즉 황제 같은 최고 지도자 명칭이라고 한다.

한인은 한인국의 황제이고, 한웅은 배달국 또는 구리국이란 나라의 지도자이며 단군은 조선국의 지도자 이름이다. 

 

 

 

마고의 나라가 세워진 곳은 지금의 파미르 고원 지역이라 한다.

마고성은 8려의 음에서 나왔으며 8려의 음에서 마고가 태어났다고 한다.

마고여신은 음악에 의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파미르 고원에 있는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고 이 성의 주인 마고라는 여성(혹은 여신)에게는 궁희와 소희 두 딸이 있었고 이 둘이 겨드랑이로 출산을 하여 궁희는 황궁과 청궁 소희는 흑소와 백소를 낳스며 이들은 네 천녀와 결혼하여 12명의 자식(아시아와 아랍의 종족)을 낳는데 이 들이 인간의 시조라고 한다.

한인국도 여기에 나오는 12부족의 한 일파로 이중 동쪽으로 이동한 밝달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달국(구리국)의 시조 '거발한 한웅'의 모습이다.(BC3898년)

한인국 마지막 황제인 '지위리'한인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 그 중 서자인 '거발한'은 동방의 원시 생활을 평소 구제하고 싶어 하였는데 이에 지위리 한인이 거발한에게 한국의 초대황제인 '안파견'이 물려준 '천부인(용경, 황검, 맥고)' 세 가지를 주며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뜻으로 인간을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거발한은 지위리 한인의 명을 받들어 '밝달족'이라고 하는 민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행군하게 되었다.

하지만 밝달족의 행군 속도가 너무 느려 거발한은 수십만의 무리 속에서 날래고 용감한 3천명을 뽑아 '제세핵랑군'이라 칭하고 스스로 그 제세핵랑군을 이끌고 길을 개척하게 되었고 한웅 거발한이 이끄는 제세핵랑군과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밝달족과의 거리가 무려 5천리 이상이 되자 당연히 후미의 부족들은 한웅의 소식을 몇달이나 지나서야 듣기가 일쑤였는데 이중 이동중에 낙오한 부족들은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더러는 그 자리에 정착하였는데 이 들이 지금의 동아시아 근방의 나라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한인 안파견 천제

고대 한국을 7대에 걸쳐 3301년을 다스렸다는 한인국의 첫번째 지도자(BC7199년)

단군신화에는 하느님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본래 파미르고원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우리민족의 조상이며 대를 이어온 족장으로 추정된다.

 

 

1963년부터 청학동에 삼성궁을 건설한 한풀선사(강민주)

 

 

 

 

건국전 전면

 

 

 

삼성궁;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도장().
경남 하동군 청암면.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성전.
 

청학동 도인촌이 있는 골짜기 서쪽 능선 너머 해발 850m에 있다. 정식이름은 지리산청학선원 삼성궁으로, 묵계 출신 강민주(한풀선사)가 1983년부터 33만㎡의 터에 고조선 시대의 소도()를 복원하였다. 궁의 이름은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궁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도인촌과 달리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한풀선사를 중심으로 수행자들이 선도()를 지키고 신선도를 수행하는 도장()이다.

수행자들은 새벽에 일어나 삼법수행을 하고 해맞이 경배를 드린 뒤 선식으로 아침을 먹고 활쏘기·검술 등 전통무예와 선무를 익히며, 오후에는 솟대를 세우거나 밭을 일구고, 저녁에는 법문을 공부한다. 한풀선사와 수행자들이 이곳이 소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쌓고 있는 솟대는 1000개가 넘는다. 한반도와 만주를 상하여 조성한 연못, 한낮에도 햇빛 한점 들지 않는 토굴, 전시관, 전통찻집 아사달, 천궁, 숙소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맷돌·절구통·다듬잇돌 등으로 꾸며진 길과 담장과 함께 짜임새 있게 가꾸어져 있다.

관광을 하려는 탐방객이 궁 입구에 있는 을 세 번 치면 안에서 수행자가 나와 맞이한다. 탐방객 가운데 한 사람은 고구려식 도복으로 갈아입어야 안내를 받을 수 있다.

1년에 한 번 가을 단풍철이 되면 개천대제라는 행사를 여는데, 이때 한풀선사와 수행자들이 닦은 무예를 구경할 수 있다.

주변에 청학동·하동호·청암계곡 등 관광명소가 많다. 찾아가려면 하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청학동행 버스를 타고 궁 앞에서 하차한다. 승용차로는 하동읍에서 횡천면 방면 2번국도에서 청암면 청학동 방면 지방도를 탄다.- 두산백과에서 -

 

 

 

마고성을 거쳐 건국전을 관람하고 하산하면 청학의 건물이 다시 나온다.

건물 안은 지성소와

관리사무실 및 기념품을 파는 매장 등이 있다.

 

 

 

 

청학동은 해발 800m의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으며, 삼신봉 남쪽 자락으로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지리산 마을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거하던 곳이다.전설로는 청학이 많이 노닐던 곳이라는 유래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묵객들이 삼신봉을 중심으로 한 살기 좋은 곳, 즉 이상향을 찾아 나섰던 바로 그런 곳이 란 느낌이 들게 하는 산세와 물줄기를 가지고 있다.청학동이란 '푸른 학'이라는 뜻으로 전설에 의하면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면서 도술부리는 새로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청학하면 신선을 상징하고 신선하면 청학을 연상 시켰다.

현재 지리산 청학동으로 불리는 도인촌은「儒佛仙三道合一更正儒道會」라는 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 불교, 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큰 도를 크게 밝혀 경사도 많고 크게 길한 유도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도' 라는 뜻이다.이들 대부분은 논밭에서 식량을 자급하고 양봉과 축산, 약초, 산나물 등을 캐다 팔고 하동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쓰고 있다.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흰 한복 차림에 처녀 총각 등은 머리를 땋아 댕기를 드리고 남자 어른은 상투를 틀고 여자 어른은 쪽지를 지며, 한결같이 흰옷 도포를 입고 잊혀진 옛 생활을 다시 시작였으며, 언젠가는 그 이상의 세상이 여기에 올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청학동 마을에는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 이 서당에서는 청소년에게 한학과 예절 등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우리의 오랜 옛생활이 현대와 저만치 거리를 두고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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